몸을 잃어버린 사회, 스토킹이 늘어나는 이유..."집착하고 들러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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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의 촉각성을 복원하는
모든 미학을 응원할 것이다
지난 14일, <SBS>의 '그것이 알고 싶다'는 「아내의 마지막 음성파일 - 1시간 45분에 담긴 그날의 진실」을 보도했다. 한 여성의 사망 사건은 집착적 스토킹과 가스라이팅이 결합된 폭력 관계가 어떻게 비극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 이 방송은 최근 출간된 『모양 없는 육체』를 떠올리게 했다. 이 책은 "현대의 범죄는 점착 충동"이라고 지적한다.
방송에 나온 피의자는 연인 관계였던 피해자를 지속적으로 통제하고 협박하며 심리적으로 압박했다. 특히 그는 피해자에게 잘못이 있는 것처럼 상황을 조작하고 녹음까지 남기며 가스라이팅의 전형적 방식으로 상대를 붙잡아 두려 했다. 이러한 집착과 통제가 극단적 폭력으로 확대되면서 결국 피해자의 죽음으로 이어졌다는 점이 사건의 핵심으로 지목된다.
현대 범죄의 특징은 과거처럼 노골적인 폭력이 아니라 타인에게 집착하고 들러붙어 통제하려는 '점착 충동'에 있다. 스토커와 가스라이터는 단순한 심리적 나르시시스트가 아니라 타인을 자신의 가상적 신체 일부처럼 다루며 지배하려는 실천적 나르시시스트로, 상대를 조종하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쉽게 버리는 도착적 관계를 형성한다. 특히 네트워크와 이미지 중심 문화가 확산된 사회에서는 가상적 자아와 몸을 마음대로 조작하는 감각이 강화되면서 스토킹과 가스라이팅 같은 통제적 범죄 역시 더 쉽게 확산되는 경향을 보인다.
타자를 외부가 아니라
자신 몸 안으로 체내화
최근 출간돼 눈길을 끌고 있는 『모양 없는 육체』는 현대 사회가 타자를 외부가 아니라 자신의 몸 안으로 끌어들여 관리하는 '타자의 체내화' 경향에 빠져 있다고 비판한다. 다이어트·헬스·성형 등 몸 관리 문화는 몸을 사유물이나 전시물로 만들며 공동체 감각을 약화시키고, 인터넷과 디지털 기술은 접촉과 촉각을 약화시켜 인간의 육체적 경험을 더욱 빈약하게 만든다고 본다. 저자는 『관종의 시대』(그린비 | 2020), 『과잉존재』(한겨레출판사 | 2021)에서 이 같은 문제의식을 품어왔던 김곡 영화감독이다. 그는 「가족계획」, 「보이스」, 「고갈」 등을 연출했다. 지난 13일, 김 감독을 서면 인터뷰했다.
『모양 없는 육체』는 몸을 가꾸는 시대처럼 보이지만 실은 몸의 감각과 타자 경험이 사라지고 있는 현대 사회를 날카롭게 해부한다. 즉, 인간이 여전히 '몸에 얹혀사는 존재'임을 상기시키는 도발적 철학 에세이다. 몸의 문제는 디지털 문화에서 범죄와 노동의 병리적 현상에서 이미지만 계속 바꾸려는 '보톡스 민주주의'으로까지 확장된다. 김 감독은 "과거처럼 적국의 미사일 공격이나 자연재해를 걱정할 필요는 없어졌으나, 그 대신 우린 우리 체중을 근심하며 매일매일 뱃살과의 전쟁을 치른다"라며 "뱃살이 마지막 타자가 되어버린 이 웃픈 상황을 직시하지 않고서 현대 나르시시즘 문화를 논하는 것은 공허하다"라고 지적했다.
미국과 이란의 전쟁이 격화되면서 사망자가 3천 명을 넘었다. 양측이 협상할 여지가 줄면서 전쟁을 장기전으로 돌입할 것으로 보인다. 이번 전쟁은 중동을 넘어 유럽으로까지 번지고 있다. 그런데 기자는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지고 있는 항전을 스마트폰의 작은 화면으로 바라보면서 저녁에 뭘 먹을지 고민 중이다. 어떤 것을 시켜야 덜 살찔지 계산하는 것이다. 전 지구적 공동체 문화는 내 뱃살로 대체된다.
『모양 없는 육체』의 저자인 김곡 영화감독이다. 방송에 나온 한 여성의 사망 사건은 스토킹과 가스라이팅이 결합된 '점착적 폭력'이 어떻게 비극으로 이어지는지를 보여준다. 김 감독은 이러한 범죄의 배경에 타자와의 접촉이 약화되고 몸의 감각이 사라진 현대 디지털 사회의 병리를 지적한다.
접촉·두려움 잊어버린 감각
공동체의 인지감수성 둔화
중요한 건 타자와의 접촉이자 관계 회복이다. 스마트폰 넘어 침을 튀기며 마주해야 하는 것이다. 김 감독은 "접촉성과 공공성에 대한 둔감화가 함께 초래되며, 이는 날이갈수록 강화되어 가는 '공동체 인지감수성'의 둔화경향과 결코 무관치 않아 보인다"라고 일갈했다. 결국 현대 사회의 문제는 '몸의 부재'가 아니라 접촉과 두려움을 잊어버린 몸의 감각에 있으며, 인간은 다시 자신이 몸에 '얹혀 사는 존재'임을 자각하고 타자와의 실제적 접촉을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모양 없는 육체』가 강조하는 건 세상과 소통하고 접촉하는 진정한 육체를 되찾자는 것이다. "과학기술의 발전과 경제적 풍요와 함께, 접촉의 방식이 인터넷으로 넘어왔지만, 이는 외려 접촉을 앗아가는 방식을 통해서이다." 김 감독은 "이제 누군가를 마주치고 알아가기 위해 손발과 얼굴을 써서 다가가고 두드리고 말 걸고 기다릴 필요도 없어졌다"라며 "아마도 인터넷이 꿈꾸는 일등시민이란, 두뇌에 손가락만 달려서 마우스만 깔짝깔짝 클릭질 하는 기괴한 모습일 것 같다"라고 질타했다.
"현대사회의 모든 미학적 문제는 촉각과 시각의 안티노미(이율배반 혹은 자가당착), 몸과 두뇌의 안티노미에 있다."(본문 중에서) 이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시각과 촉각에 대한 분석은 프랑스 철학자 메를리퐁티(1908∼1961)의 후기작에서 차용했다. "메를로퐁티의 후기작에서 가장 큰 교훈을 찾으라고 한다면, 그것은 단연코 '시각의 촉각성'일 것이다. 시선과 달리, 촉각엔 일방향성이 없다. 우리가 무언가를 만질 때, 우리도 만져져야 한다. '만져지지 않으면 만질 수도 없다'는 운명적인 상호성이 촉각의 본질이다. '내가 먼저 타자가 되지 않고서는 어떤 타자도 만날 수 없다'로도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김 감독은 "시각의 촉각성을 복원하는 모든 미학을 응원한다"라고 강조했다.
AI에 대한 비판도 몸과 연결된다. 김 감독은 지혜는 정보의 축적이 아니라 공포와 결단을 동반한 육체적 경험에서 나온다고 주장한다. 몸 없는 AI는 이러한 지혜를 가질 수 없다고 분석한다. 예를 들어, 그라운드 밖에서 정보를 분석하는 축구 해설가와 달리, 공을 빼앗길 수 있는 두려움 속에서 순간의 선택을 해야 하는 축구 선수에게서 지혜가 나타나는 것처럼 말이다. 몸이 없고 잃을 것에 대한 공포도 없는 AI는 아무리 많은 정보를 처리하더라도 지혜에 도달할 수 없다. 결국 지혜란 위험을 피하는 계산이 아니라, 위험을 무릅쓰는 절박한 결단에서 생겨나는 인간적 능력이다.
아래는 인터뷰 전문이다.
△『모양 없는 육체』를 매우 흥미롭게 잘 읽었습니다. 서문에서 “이 책은 이러한 타자의 체내화 경향에 저항하기 위해 쓰였다.”라고 적으셨습니다. 좀 더 구체적인 집필 의도나 에피소드가 있으실까요?
‘타자의 체내화’는 제가 만든 말인데요, 『관종의 시대』와 『과잉존재』부터 품어왔던 문제의식입니다. 식자들은 타자가 사라지고 있다고들 말하지만, 정작 우리는 뱃살과 싸우고 있습니다. 과거처럼 적국의 미사일 공격이나 자연재해를 걱정할 필요는 없어졌으나, 그 대신 우린 우리 체중을 근심하며 매일매일 뱃살과의 전쟁을 치릅니다. 뱃살이 마지막 타자가 되어버린 이 웃픈 상황을 직시하지 않고서 현대 나르시시즘 문화를 논하는 것은 공허합니다.
전쟁은 없어진 게 아닙니다. 우리네 몸이 이미 전쟁터입니다. 과거의 돌격전을 당신이 하는 헬스 운동이, 참호전을 당신이 입는 보정속옷이, 포격전술을 당신이 먹는 콜라겐 드링크가 대체했을 뿐입니다. 그런 살과의 전쟁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게 타자경험의 전부가 되었음이 문제입니다.
△책에서 중요한 화두 중 하나는 “몸은 타자다. 단, 몸은 내가 살아내는 타자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내 몸을 아름답게 가꾸고 아끼는 것은 타자를 위해서 좋은 것 아닐까요? 이 뜻을 좀 더 쉽게, 예를 통해 설명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몸을 가꾸지 말고 거지처럼 살자는 건 아닙니다. 가꾼다는 말로 포장되곤 하지만, 현대의 몸문화(다이어트ㆍ헬스ㆍ성형ㆍ패션ㆍ건강관리…)는 ‘몸의 자본화’에 가깝습니다. 이런 몸문화는 몸을 나만의 ‘사유물’로, 나아가 ‘전시물’로 격하시킵니다. 접촉성과 공공성에 대한 둔감화가 함께 초래되며, 이는 날이 갈수록 강화되어 가는 ‘공동체 인지감수성’의 둔화경향과 결코 무관치 않아 보입니다.
‘무대에 갇힌 배우’를 예로 들고 싶습니다. 어떤 스타 배우가 있다고 해보죠. 그는 너무 유명해서 스크린과 방송에 출연하는 것만으로도 돈을 법니다. 업계 관계자들은 그를 섭외하려 늘 줄을 서고, 촬영장에 가면 모든 스태프들이 그의 동선에 맞춰 움직이며 비위를 맞춰줍니다. 그는 버스를 타려고, 혹은 밥을 먹으려고 줄을 설 필요도 없습니다. 스태프들과 매니저들이 그의 손발이 되어 알아서 움직여주니까요. 그는 부지불식간에 자기 몸이 돈 버는 콘텐츠라는 관념을 형성합니다. 동시에 그에게 세상은 일거수일투족에 따라 알아서 움직여주는 부속물처럼 나타납니다. 무대에 갇혀버린 셈이죠. 무대가 온 세상인 것처럼 그에게 대중교통을 타려고 줄을 서는 등의 공공성은 불필요한 것으로 느껴지며, 극단의 경우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문제는 이것이 이젠 특정 직업군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무대는 어디에나 있는 시대가 되었고, 적어도 핸드폰 속에선 우리 모두가 배우가 되어야 하니까요. 몸을 전시물로 착각할수록 공동체라는 관념은 그래서 약화됩니다.
그러나 몸은 사유물도, 전시물도 아닙니다. 몸은 우리가 마주치는 최초의 타자입니다. 감기만 걸려도 몸은 우리 말을 듣지 않으니까요. 우린 어디까지나 몸에 얹혀사는 세입자라는 사실을 외면하고서는, 그 어떤 다른 타자도 온전히 감각해낼 수 없습니다.
△책에서는 AI가 몸이 없어서 육체의 지혜를 흉내 낼 수 없다고 지적하셨습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피지컬 AI 등 대육화의 조짐도 보이고 있습니다. AI로 인해서 ‘모양 없는 육체’ 사회가 더 확산되거나 강화되거나 변형될 것 같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결단해낼 타자로서의 단단한 몸이 그들에겐 없다. 집단지성은 결코 현명해질 수 없다. 스마트해질 수 있을 뿐.
같은 이유로 AI가 사법 판단까지 대신해줄 거란 희망도 헛되다. AI는 진보할수록 이성적인 현자는커녕 스마트한 편집증자가 될 뿐이다. 이른바 ‘AI 환각현상(AI hallucination)’은 오류가 아니라 AI의 운명이다. 아무리 딥러닝 노드를 늘리고 외부검색 채널을 보강해도 소용이 없다. 뿌리내릴 몸이 없어서 자아와 타자의 경계조차 긋지 못하는 AI 두뇌는 자신의 모든 연산을 현실로 받아들이며, 최악의 경우 데이터와 사물을 혼동하는 편집증자가 되리라. 코르지브스키의 통찰처럼 “말은 사물이 아님을 기억해 내지 못하는” 이진법적 체계는 이성은커녕 “환각에 이를뿐”일 테니까. AI는 결코 육체의 지혜를 흉내 낼 수 없다.”
지혜는 정보가 아닙니다. AI의 특출난 능력은 정보에 있지, 지혜에 있지 않습니다. 정보와 지식을 아무리 많이 모은들, 거기서 지혜가 나오지 않습니다. 지혜의 본질은 공포와 결단에 있습니다. ‘무릅씀’이라는 술어가 딱 맞는 표현일 것 같은데요, 축구 선수와 축구 해설가를 예로 들고 싶습니다. 축구 해설가는 그라운드에서 멀찌감치 떨어져서 각 선수들의 특기, 각 팀의 전략 같은 정보들을 모아서 해설을 할 순 있습니다. 그러나 그라운드를 몸소 뛰고 있는 축구 선수의 경우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는 공을 몰아 내달리며 막아서는 수비수들 앞에서, 몸소 공을 빼앗길 수 있다는 공포에 직면하며, 그 공포를 무릅쓰고서 뚫고 나갈 것인지, 한번 접을 것인지, 패스할 것인지를 결단해야 합니다. 그리고 삼각패스로 수비대형을 무너뜨렸을 때, 그것을 우린 ‘지혜롭다’라고 말하고요. 축구 해설가는 유식할 순 있어도, 축구 선수처럼 지혜로울 수는 없습니다. 그라운드에 몸을 담고 있지 않는 축구 해설가에겐 공을 빼앗길 것이라는 공포, 그것을 무릅쓰는 결단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AI가 딱 그렇습니다. 몸이 없고, 그래서 무언가를 잃을 것이라는 공포가 없는 그에게 무릅쓸 일도 없습니다. 무릅쓸 게 없으니 지혜도 있을 수 없겠지요. 지혜는 공포를 다스리는 절박함에서 나옵니다. 리스크를 줄이는 계산이 아니라, 리스크를 무릅쓰는 용단입니다.
아마도 AI가 지혜롭게 된다면, 그건 그가 공포감을 감지하는 하드웨어가 주어졌을 때 일 겁니다. 그러나 그땐 이미 우린 그를 AI라 부르지 않겠죠.
△『모양 없는 육체』는 어떤, 유토피아적인 인간의 육체에 대해서 희망(?)을 품고 있는 듯합니다. “육체 없는 주권이란 없다. 인터넷은 분명 주권을 증명하지만, 이는 육체의 필요성을 소거함을 통해서다.” 저자님이 생각하시는 바람직한 육체라는 게 있나요? 혹은 바람직한 타자와의 관계(혹은 사회)가 있나요? 아니면 사회병리학적으로 집착하는 육체만을 비판하시는 것일까요?
적절히 세상과 접촉하는 모든 육체는 바람직합니다. 불행히도 우린 점점 접촉하는 법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과학기술의 발전과 경제적 풍요와 함께, 접촉의 방식이 인터넷으로 넘어왔지만, 이는 외려 접촉을 앗아가는 방식을 통해서입니다. 이제 누군가를 마주치고 알아가기 위해 손발과 얼굴을 써서 다가가고 두드리고 말 걸고 기다릴 필요도 없어졌습니다. 노트북과 핸드폰 앞에서 손가락만 깔짝대는 클릭질만으로도 충분해졌으니까요. 손발을 움직일 필요도 없이 두뇌들을 통해서 정보들만이 복사되고 전송되며, 그것을 이젠 ‘소통’이라고 부릅니다. 아마도 인터넷이 꿈꾸는 일등시민이란, 두뇌에 손가락만 달려서 마우스만 깔짝깔짝 클릭질 하는 기괴한 모습일 것 같습니다.
인터넷의 제일목표는 모든 촉각의 절멸입니다. 우리가 촉지각할 세계 자체를 없애버리고서, 촉각의 필요성 자체를 없애버리는 것이 인터넷의 원대한 목표입니다.
그러나 주권 개념엔 이미 접촉의 개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시대에 따라 미묘하게 변천해왔을지라도, 어떤 주권 개념에도 ‘방해받지 않는다’라는 접촉개념이 포함되어 있으니까요. 접촉을 전제하지 않는 주권 개념은 없습니다. 접촉의 필요성이 점점 없어지는 시대에 가장 위태로운 정치개념이 ‘주권’인 이유입니다.
△헬스, 성형수술, 포르노, 딥페이크 그리고 스토킹과 가스라이팅의 유행이 ‘촉각의 결핍’(헬스는 좋아요, 스토킹은 피로 메꾼다) 때문이라는 분석이 흥미롭습니다. 그런데 촉각의 결핍이 극복될 수 있을지 우려됩니다. 책에서 비판하신 ‘지구 최초의 성형중독자’ 자본주의뿐만 아니라 코로나19 등 생태학적 측면에서도 점차 거리두기가 강화되는 듯합니다. “현대사회의 모든 미학적 문제는 촉각과 시각의 안티노미(이율배반 혹은 자가당착), 몸과 두뇌의 안티노미에 있다.” 저자님이 생각하시는 촉각과 시각의 복원(?)은 어떤 모습이신가요?
이 책이 가장 기대고 이는 철학자가 메를로퐁티인데요, 메를로퐁티의 후기작에서 가장 큰 교훈을 찾으라고 한다면, 그것은 단연코 ‘시각의 촉각성’일 겁니다. 시선과 달리, 촉각엔 일방향성이 없습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만질 때, 우리도 만져져야 하니까요. ‘만져지지 않으면 만질 수도 없다’는 운명적인 상호성이 촉각의 본질입니다. ‘내가 먼저 타자가 되지 않고서는 어떤 타자도 만날 수 없다’로도 번역할 수 있겠네요.
그러나 불행히도, 이러저러한 문화와 산업의 발달로 시각은 점점 촉각성을 잃어가게 되었고, 앞으로도 이런 경향은 강화될 것으로 보입니다. 설상가상 병균조차 인류를 도울 생각이 없었는지, 코로나 이후로 거리 두기는 일상의 저변이 되었고요.
시각의 촉각성을 복원하는 모든 미학을 응원합니다. 그런 미학은 시각을 통해서도 부대끼고 문지르고 어르는 어떤 미학일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내가 여전히 내 몸에 얹혀사는 세입자임을 일깨우는 드라마일 것입니다.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 인공지능 등 디지털에 대해서 굉장히 날선 비판을 하셨습니다. “이번 세기, 인간은 두뇌를 양도하지 않고도 두뇌 주권을 포기했다. 사유와 결단의 주권을. 독재군주가 없어졌는데도 군중은 두뇌의 주인이 되지 못한다.” 하지만 현시점에서 두뇌 주권을 갖기 위한 동력 역시 디지털의 긍정적 기능에 있는 건 아닐까요?
이 책은 디지털을 비판하지만, 사실 디지털은 피할 수 없는 것이며, 어떤 점에선 운명적입니다. 디지털은 사물을 가볍게 만들려는 충동이 자연스레 확장된 결과니까요. 자동차가 옮기기 쉽게 몸무게를 줄여주었듯이, 컴퓨터는 옮기기 쉽게 사물의 물게를 줄여줍니다. 문제는 사물의 무게가 줄어드는 만큼 인간의 생각과 감각도 가벼워진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젠 쉽게 옮겨지고 금방 받아들여지는 말과 생각들만이 정보의 핵심이 되고, 두뇌는 그것을 옮기는 환승정거장, 혹은 잠시나마 저장해놨다가 언제든지 출력해주는 외장하드 정도로 격하되었습니다.
물론 우린 디지털의 긍정적 기능을 목도합니다. 부패하고 관성화된 레거시 미디어에 대항하는 역할도 톡톡히 해주며, 전파도 빠르고 연대도 빠릅니다. 하지만 이런 긍정적 기능은 두뇌가 여전히 우리의 것일 때, 즉 생각하고 결단하는 능력이 온전히 우리 몸에 뿌리내릴 때라야만 온전히 발휘되는 것입니다.
신체를 온전히 놔두면서 중립적으로 작동하는 과학기술이란 없습니다. 우리네 두뇌가 기술이 신체의 일부라고 착각하기 시작할 때, 기술도 우리 두뇌를 자신의 일부로 삼을 것이며, 그 대가는 혹독할 겁니다.
△책의 1장 ‘단단함에서 물렁함으로’가 이 제일 흥미로웠습니다. 그런데 단단함의 시대 역시 물리적 폭력과 정신적 집착·망상 등이 난무했었던 것 같습니다. 시대가 변한 것 이외에 둘 사이에 무엇이 더 낫다는 게 있을까요? 아울러, 물렁함 이후의 사회는 어떠한 것인지 예측해 볼 수 있을까요?
이 책에서 ‘단단함의 시대’라고 불렀던, 무력과 권위로 억압하던 지난 세기가 더 낫다고 말하려는 건 아닙니다. 각 시대의 특성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지난 세기엔 단단함이 무기였고, 그래서 억누르고 억압하던 시대였다면, 이번 세기는 물렁함이 무기고, 그래서 유연하게 변신하고 꿀을 빨며 들러붙는 시대라고 말할 수 있을 뿐, 어느 것이 더 낫다고 말할 순 없습니다. 돌에 맞아 죽는 것과 꿀에 빠져 죽는 것, 둘 중에 어느 것이 더 나은 죽음이냐는 질문에 대답할 수 없듯이.
물론 다른 점이 있습니다. 지난 세기엔 돌을 보면 적어도 무서워할 줄은 알았으나, 이번 세기엔 꿀을 봐도 무서워할 줄 모르게 되었다는 것만큼은 분명히 다릅니다. 지난 시대엔 두려움이 너무 많아서 병리현상이 일어났다면, 이번 시대엔 두려움이 너무 없어져서 병리현상이 일어납니다.
이번 세기에 우리네 몸이 되찾아야 할 감각은 ‘두려움’입니다. 여전히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감각의 층위에선 으레 누락되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몸의 존재인 한, ‘살이 찢기면 아플 수도 있고, 아프면 죽을 수도 있으며, 고로 아프고 죽지 않으려고 저항한다’는 원초적 사실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밟고 있는 이 땅도 누군가의 고통과 저항으로 다져져 왔다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이 원초적 사실을 감각해 내는 데에 실패할수록 물렁함의 패러다임은 더욱 득세할 테고, 그 가장 빠른 징후는 생활세계보다는 정치의 영역에서 나타날 것입니다. 우린 이미 그 징후들을 충분히 목격하고 있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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